역사 속의 지리산(13)조선도자와 찻사발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11-07-29 12:57 | 2,041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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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지리산(13)조선도자와 찻사발
지리산·낙동강 태토가 빚어낸 조선다완


16세기 후반은 변화의 시기였다. 임진왜란으로 정칟경제·사회·문화가 꿈틀거렸고 명종대는 을사사화, 선조대는 붕당정치의 시작으로 동인·서인이 나누어지는 정국이 계속됐다. 한편 서원과 향약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면서 성리학은 더욱 더 빛을 발했고 이는 조선도자에 영향을 미쳐 분청자기가 백자에 흡수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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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도 찻사발(16C 후반·일본 개인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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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웅천 찻사발(16C·일본 개인 소장)
이 시기 분청자 요지에서는 귀얄분청자, 분장분청자와 함께 연질백자가 주로 발견됐다. 연질백자로는 진해 두동리, 하동 백연리 요지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찻사발이 대표적이다. 그 당시 일본에서 다완으로 쓰인 조선다완을 대표하는‘이도다완’도 연질백자의 한 예다.

진해 두동리 요지는 2001년 시굴을 거쳐 2002년에 발굴조사됐다. 발굴 결과 여섯 기의 가마와 폐기물 퇴적층이 조사됐는데, 퇴적층은 심하게 교란돼 있었다. 출토 유물은 16세기 전반·중반경의 분청자와 백자들로 사발·접시가 대부분이었다.

하동 백연리 가마터는 1985년 국립경주박물관 지표조사를 통해 알려졌으며 그 중 1호 요지가 2001년 발굴조사됐다. 출토 도편은 귀얄분청자와 분장분청자의 사발·접시들과 연질백자, 경질백자편이었다.

16C 후반 성리학 조선도자에 영향…분청자기에 백자 흡수

최근 이러한 경남 지방의 연질백자는 지리산과 낙동강 주변지역의 태토(자기를 빚는데 바탕이 되는 질흙) 등 지질학적 상황이 뒷받침됐기에 가능했다. 연질백자는 경질백자에 비해 태토가 자기화돼 있지 않아 퍼석퍼석하고 강도가 약하지만 흡수율이 높고 단열과 내열성이 좋아 다도세계에서 인기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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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해 두동리 요지 출토 도편·16C 후반
주목할만한 것은 일본에 남아있는 조선다완이 주로 이 연질계통의 백자였다는 것이다. 이 시기에 일본에서는 ‘조선다완’이라는 찻사발이 전해져 널리 사랑을 받았다. 조선다완은 1537년 차와 관련된 문헌인 <다회기> 등에서 처음 선보였다. <다회기>는 다도의 일기로서 16세기 다도의 모습과 미술을 파악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자료로 알려져 있다.

조선다완은 1573년 후쿠이현의 일조곡 조창씨 유적에서 많은 양이 출토되면서 모모야마시대 천정년간(1573~1591)동안 유행하게 된다.

1980년대 후반 고고학적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뤄지면서 조선다완은 늦어도 1573년에 전래됐을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최근에는 오사카·시가 등에서도 유적연대에 부합하는 각종 다완이 출토되고 있어 조선다완 연구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도움말·사진/윤용이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도자사)
[경남도민일보 박종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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